완전한 절망 가운데 만난 완전한 희망

나 자신 젊은 시절 희망을 완전히 잃어 버린 날이 있었다.
 
약 12년 동안 많은 병원과 한의원, 민간요법, 신유 치료 등을 전전하였지만 불치병이라고 선고받은 병(강직성척추염)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악화되어 걷기, 식사하기, 앉기, 잠자는 것조차 통증으로 인해 힘들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날들이 점차 많아졌었다.

얼마나 고통스런 날들이었는지 그날을 돌이켜 보는 것조차 눈시울이 뜨거워지게 된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말기암환자와 같이 죽을 수 있는 병이면 차라리 좋을텐데...
늙을 때까지 수십년을 매일, 매년 더해가는 통증과 굳어가는 몸, 약의 부작용, 가족까지 힘들고 어둡게 만드는 것을 보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 노랗다'는 말을 생각하였다. 그래, 그 때는 정말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으면 파란 하늘도 노랗게 보이는가 보다.
세상을 보니 어떤 곳에서도 이젠 더 이상 치유의 희망을 가질 곳이 없었다.
X-lay 결과 및 유명 병원 검사결과 및 해외에 알아본 결과 등 나 스스로 객관적으로 볼 때도 더 이상 길이 없었다.
앞과 옆과 뒤를 보아도 길이 없으니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으려면 죽는 길 밖에 없었다.

어제 뉴스에 양산의 한 주부가 딸 3명을 죽이고 자살을 하였다.
카드 빚 6,000만원 대출받아 집을 샀는데 IMF로 실직되어 빚이 계속 늘어 고민하다 남편에게 유서를 남기고 간 것이다.
사람이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이런 극단을 선택하기도 한다.

나 자신도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더 편한 유일한 길로 보이면 그것을 택하게 된다.
그렇지만 가족 친척들이 믿음이 없는 가운데 기독교인으로 자살하면 하나님께 불명예를 돌리는 것이 싫어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사방이 막혔으니 남은 길은 위를 보는 길 밖에 없었다.
아니, 여러 해 동안 기도도 하고 신유치료도 받아 보고 이미 하나님을 많이 찾았었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의 기도는 들어 주시면서 나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는가,
나를 사랑하시는가, 정녕 살아 계시는가 하는 의문마저 들었다.

희망을 가졌다가 실망하게 되는 많은 치료들에 지쳐서 이젠 차라리 더 이상 희망을 갖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성경은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으니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1981년 겨울, 산에 올라 하나님만 찾으며 금식기도하다 굶어 죽든지 하나님을 만나 살 길이 열리든지 양단 간에 결단을 내기로 하고 금식을 시작하였다.
더 이상 그렇게는 살 수 없었다.

그 금식기도원에는 약 2,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와서 부르짖고 금식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나 자신이 가장 비참한 것 같았다.
왜냐하면, 모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데 나는 앉지도 못하고 제일 뒤에 담요를 깔고 누워 예배를 드려야 하였으니…

가장, 비참하고 참담하였던 그 날들… 돌이켜 보면 그 날들에 하나님께서 가장 가까이 계셨고 
내게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역사가 그 날들을 통해 일어났다.

아브라함이 본인도 아내도 아들을 낳는다는 희망이 다 끊어진 100살이 되어서야 아기를 낳았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인 것을 깨달은 것과 같이, 나의 질병도 세상의 능력이 끝난 것을 깨닫고 
하나님만 바라 보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나를 사랑하심을 잊을 수 없는 교훈으로 뼛속 깊이 
사무치게 깨닫고 배우게 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지경까지 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다.

그러한 경험이, 모든 것이 깜깜하게 보일 때에라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의 희망을 갖게 되고, 
환경이나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새로운 신앙이 싹트게 되는 시작이 되었다.
그 깜깜한 날들 중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시편 귀절이 있었다. 그것은 42:5, 11, 43:5 이다. 
꼭 같은 내용의 아래 구절이 3번이나 반복되어 중요한 귀절로 여겨지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왜냐하면, 전반부는 낙망하며 불안해 하는 나의 심정과 같은데, 후반부는 오히려 찬송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고 싶기는 하나, 그와 같은 갑작스런 도약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생명을 건 금식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자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을 바라라” 이 간단한 말, 즉 “Hope in God”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가지라. 
이것이 비결이었다. 하나님을 만나면 해결되고 하나님 안에는 불가능한 것이 없으니까...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이 역경 가운데 자원이 고갈하고 더 이상 삶을 통제할 수 없을 때, 
자신을 넘어서는 자원들을 찾게 되고 신성(神聖)을 찾게 된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 신성(神聖)과 마주치고, 초월의 영역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다른 공기를 마시는 것과 같고, 보통의 존재를 뛰어넘어 올라가는 것과 같다.  
그것은 거룩함과 마주치는 것과 같다."
정말 그러하였다. 완전한 절망 가운데 하나님을 마치 보듯이 만나는 경험은 그와 같은 초월적인 느낌을 가지게 하였다. 
시편기자의 표현과 같이 낙망하고 불안해 하던 내가  오히려 감사와 찬송이 넘쳐 하늘에 사는 느낌을 여러 달 가지게 되었으니까.

만일 그렇다면, 인간의 한계를 넘는 절망은 가장 큰 희망으로 인도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그 길이 아니면 사람이 위만 보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고통을 허락하시고...
그러한 의미에서 완전한 절망도 완전한 희망으로 가는 축복이 될 수 있지 않은가?

Jung ParkComment